호쿠사이에 대해

北斎肖像画 渓斎英泉画

스미다가 낳은 세계적인 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 北斎)”

스미다 구(墨田区)는 긴 역사를 가진, 도쿄 23구 중에서도 특히 오래된 행사와 전통기술이 남아있는 구 중 하나입니다.이런 역사를 자랑하는 “스미다”는 정치가, 사상가, 종교가, 문필가와 예술가 등, 다양한 활약을 한 위인을 다수 배출하고 있습니다.
우키요에(浮世絵) 화가인 가츠시카 호쿠사이(1760년부터 1849년까지)도 그런 위인 중 한 사람이지만, 그 매력적인 생애와 약 70년에 걸쳐 그려낸 다채로운 작품은, 사후 약 160년이 지난 지금, 더욱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세계적으로 위대한 예술가로서 널리 주목받고 있습니다.
사실, 호쿠사이는 스미다 구에서 태어나 그 90년에 달하는 긴 생애 가운데 90번 이상 이사를 한 사실이 전해지고 있지만, 그 대부분을 “스미다”에서 보내며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작품 중에는 료고쿠바시를 비롯한 미메구리 신사, 우시지마 신사 등, 당시의 “스미다”의 경치를 수많이 그리고 있습니다.
또한,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가츠시카”는 출생지이기도 한 “스미다”를 포함한 지역이 무사시국 가츠시카군이었다는 사실에서 이름 붙었다고 합니다.

関東大震災以前(1923年)の本所南割下水

세계적인 호쿠사이

호쿠사이의 그림은 생전에 이미 외국에 알려져 있었으며, 예를 들면 네덜란드 상관(商館)의 의사로서 일본을 찾은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1796년에서 1866년까지)가 1832년부터 1851년에 걸쳐 출판한 저서 ʻNippon’의 삽화로 ʻ호쿠사이 만화’의 도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하지만, 그 이름이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1867년의 파리 만국 박람회를 시작으로 자포니즘(일본풍을 선호하는 풍조)이 일었기 때문입니다.이 박람회에서 수많은 미술 공예품과 함께 우키요에가 소개되었는데, 그 대담한 구도와 밝은 색채는 종래의 유럽 회화에는 없던 것으로,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며 인상파 탄생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호쿠사이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는 빈센트 반 고흐(1853년부터 1890년까지)와 에드가 드가(1834년부터 1917년까지) 등이 있으며 드가는 ʻ호쿠사이 만화’를 참고로 한 인물상을 그리기도 했습니다.또한, 앙리 리비에르(1864년부터 1951년까지)는 “후가쿠 삼십육경(冨嶽三十六景)”을 바탕으로 “에펠탑 삼십육경”이라는 판화 시리즈를 제작했으며,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유리공예가 에밀 갈레(1846년부터 1904년까지)는 ʻ호쿠사이 만화’의 잉어를 도안에 도입한 꽃병을 세상에 발표하기도 했습니다.음악가인 클로드 드뷔시(1862년부터 1918년까지)도 “후가쿠 삼십육경 가나가와 앞바다의 거대한 파도 아래”에서 영감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했다고 전해져 옵니다.
이처럼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호쿠사이는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아 1960년에는 빈에서 개최된 세계 평화 회의의 석상에서 세계의 문화 거장으로서 현창되었으며 또, 1999년에는 미국 잡지 ʻ라이프’에서 “지난 1000년 동안 최고의 업적을 남긴 인물 100명”으로 일본인으로서는 혼자 뽑혔습니다.

후가쿠 삼십육경 가나가와 앞바다의 거대한 파도 아래 오반(大判) 목판화 25.3×37.6 텐포 2년(1831년)경
ʻ에펠탑 삼십육경’ 앙리 리비에르 그림 리토그래프 화집 22.5×26.8 1902년

풍부한 화풍과 구상

약 70년 동안 그림에 정진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긴 호쿠사이는, 언뜻 보면 한 사람의 화가가 그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화풍이 다릅니다.19세에 가츠카와 슌쇼(勝川 春章)의 제자가 되어 슌로(春朗)라고 칭한 호쿠사이는 슌로의 시기가 끝날 무렵에는 이미 우키요에뿐만 아닌, 가노파(狩野派), 도사파(土佐派), 서양 화법 등, 다양한 종류의 회화를 습득했다고 전해집니다.그 뒤, 가츠카와파(勝川派)와는 전혀 다른 린파(琳派)라는 장식화 양식의 일파인 소리파(宗理派)를 배워 다와라야 소리(俵屋 宗理)라는 이름을 계승했습니다.이 소리파를 떠난 뒤는 천지, 우주, 자연을 자신의 스승으로 삼아 그림을 그려나가게 됩니다.이와 같은 경위와 경험이 호쿠사이의 다채로운 화풍을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호쿠사이의 풍부한 구상도 여러 작품에서 발휘되고 있습니다.도카이도(東海道)와 기소 가도(木曽街道)라는 동서로 긴 가도를 이 한 장의 그림에 담아내기 위해 가도를 미로처럼 휜 상태로 구성했습니다.소설 삽화는 대담한 화면 구성과 먹의 농담만으로 책 내용을 현장감 넘치도록 표현하여 이 분야의 제일인자가 됩니다.그림 참고서 분야에서도 종래의 단순한 참고서가 아닌, 공예 장인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판본의 페이지를 몇 페이지로 이어 높은 탑을 그리는 것으로 제한된 지면에서의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대포를 쏘아 다음 페이지에서 표적에 명중시키는 애니메이션 장면과 같은 연속성을 지닌 페이지 구성도 시험하고 있습니다.대표작인 “후가쿠 삼십육경” 시리즈를 비롯한 만년의 목판 작품은 단순히 경관이나 사람들의 생활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대상물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견해가 있는지, 또 어떻게 변화를 보여 줄 것인지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도카이도 명소 일람 오오반(大々判) 목판화 43.9×58.2 분카 원년(1818년)
귀인과 관녀도 비단본착색 35.4×60.7 덴포 10년(1839년)

호쿠사이의 생애와 명언

호쿠사이의 인품과 사고방식에 관해 그림 참고서의 서문과 발문(跋文), 편지, 센류(川柳) 등의 호쿠사이의 말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유명한 것은 호쿠사이가 75세 때 출판된 그림 참고서 ʻ후가쿠 백경(富嶽百景)’ 의 첫편 마지막에 있는 발문입니다.6세 때부터 그림을 그려왔던 호쿠사이는, 70세 이전까지 그린 그림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73세가 되어 비로소 동식물의 골격과 출생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그리고 80세에는 더욱더 성장하여, 90세에 그림에 대해 깊은 뜻을 규명하고 100세에 신묘의 영역에 도달하여 백 수십 세가 되어서야 한 점 한 선이 살아있을 것이라며 100세가 넘어서도 더욱 화가로서 향상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호쿠사이는 도바에(鳥羽絵) 등의 회화도 그려 유머를 발휘하고 있는 반면 센류도 짓고 있습니다.센류구집 ʻ하이후야나기다루(誹風柳多留)’에는 분카 6년(1809년)경부터 자신을 卍, 만자(万字) 등으로 칭한 호쿠사이의 글귀가 게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잠자리는 돌 지장보살의 머리를 묶는다”라는 구절은, 잠자리가 지장보살의 머리에 앉은 정경이 상투를 묶은 듯이 보인다는 뜻으로 그의 재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또한, 호쿠사이가 발행처 앞으로 보낸 차용증서에는 자신을 “헤쿠사이” 또는 “헤(尻)쿠사이(지독한 방귀 냄새)”라고 부르며 겸손하게 익살을 떠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호쿠사이는 “내게 5년이라는 생명이 더 주어진다면 진정한 화공이 되었을 것이다”는 말을 남겼습니다.임종 때 남긴 글귀는 “히토다마데 유쿠키산지야 나츠노하라”로,화가의 길을 계속 추구해온 호쿠사이가, 자신이 죽은 뒤에는 영혼이라도 되어 여름 들판에 한가롭게 날아가 보자는 뜻입니다.

ʻ후가쿠 백경’ 초편 한시본(半紙本) 22.6×15.7 텐포 5년(1834년)
지방측량도(地方測量之図) 오오반 목판화 37.4×52.7 가에이 원년(1748년)

스미다와 호쿠사이